뉴스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구미 옛 이야기13> 부로들이 광복선물로 건립해 준 구미중학교
2024년 03월 14일 [지비저널]

구미의 근대교육5-부로들이 광복선물로 건립해 준 구미중학교

                                                               -소설가 정완식

↑↑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한 구미중학교. 1975. 03. 01

구미처럼 중등교육을 숙원으로 삼은 고장도 없을 터이다. 구미가 시로 승격되었을 때도 중학교가 하나뿐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시로 승격되도록 농고에서 이름을 바꾼 공고 하나(국책공고 제외)에 중학교가 하나뿐이었으니 구미의 가장 큰 소원은 중학교를 설립하는 데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는 구미의 북쪽 끝에 있는하나뿐인 중학교에 가기 위해 멀리 동쪽으로 임은동, 남쪽으로 수점동, 서쪽으로 부곡동에 이르기까지 새벽밥을 먹고 자전거로 도량동의 굽이진 언덕배기로 숨차게 달렸다.


그때 학생들의 특징은 첫째, 자전거를 잘 탄다는 것이고, 둘째 학교를 산 아래로 옮긴 탓에 작업을 많이 해 일을 잘한다는 것이요, 셋째 구미의 어느 동네라도 비슷한 연배라면 중학교의 졸업 연도로 확인되는 기수가 해병대 기수만큼이나 분명하다는 점이다.

 

구미의 중등교육에 대한 염원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만큼 중학교 설립에 대한 희망은 숙원을 넘어 아주 원한이 될 지경이었다.

 

1928년경부터 선산군 청사 신축이 논의되었다. 경부선 구미면을 비롯한 다른 6개 면이 일치하여 군청을 교통이 편리한 구미로의 이전을 강력히 요구하며 맹렬한 유치전을 벌였다. 경북도에도 진정을 넣었으나 1931년 군청사는 그 자리에 신축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구미면에서는 면민대회를 개최하여 대책을 강구했는데, 군청 대신 을종(乙種) 정도의 농업학교 설립, 수리조합 설치와 군위까지의 2등도로 촉진을 요구했다.

 

을종 농업학교는 중학교 과정으로 그 무렵 후세교육을 위한 부로들의 고심이 엿보인다. 구미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구미공보를 비롯한 군내의 몇몇 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진학을 하려면 대구에 가거나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9323월 구미공보 11회 박정희 졸업생이 대구로 유학한 것이 대표적이다. 부로들이 중등교육에 신경을 쓴 것도 이런 시대의 요구가 있었던 셈이다.

 

1930년대 전반은 연년이 수해와 한해가 겹치며 군민들의 삶이 피폐해져 학교설립은 꿈도 못꾸었다. 후반은 중일전쟁의 여파로 황국신민 교육만 심화되니 교육문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구미의 중학교 설립은 15년간 논의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광복이 되자 희망이 생겼다.

 

해방 직후 19464월 장천의 오상중학교가 개교하고 선산중학교도 설립을 준비했다. 때맞춰 516일 오후 2시에 구미국민학교에서 숙원사업인 중등학교 설립을 위해 조선독립기념사업의 첫 선물로 아이들에게 중학교를 선물하자는 면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구미중학설치기성회가 조직됐다. 구미중학교의 기록으로는 194556일로 되어 있는데 광복 이전이어서 오기인 듯하다.

 

구미 면민들의 숙원사업이어서 기성회를 조직하는 자리에서 2, 3명의 독지가가 3백만 원의 거금을 내놓아 목표액 1천만 원의 달성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525일에 구미초등학교 강당에서 구미중학기성회 위원회(회장 金東晟)를 열어 기성회가 본격 활동했다,

 

이때 학교 부지는 구미초등학교 북쪽으로 지금은 주택가가 되었지만, 일본 학생들이 다니던 심상소학교 자리였다. 그곳에서 새로 건물을 짓고 개교준비를 했다.

 

1947229일 윤숙현(尹淑賢), 김상룡(金相龍) 두 사람이 돈을 내고 힘을 써서 재단법인 구미중학원(원장:陸重均)이 인가를 받아 410일에 첫 입학식을 가졌다. 그해 1023일에 다시 입학식을 가져 한 해에 두 번 신입생을 모집했다.

 

그러나 학원으로 인가되었지만, 기본금 부족으로 학교로 인가받지 못해 고민하다 194833일 기성회 직원들이 모여 토론한 결과 유지 류낙현(柳洛鉉) 씨가 답 3,900, 0(0) 씨가 4,000, 엄병탁(嚴炳卓) 씨가 1,000평을 각각 내놓기로 했다. 부족액 11천 평은 김상학(金相鶴) 씨가 내놓기로 결정했다. 면민들은 칭송이 자자하고 학생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유지들의 결단에 힘입어 그해 65일 재단법인 구미중학원은 농예중학교로 인가받았다. 김상룡(金相龍) 씨가 초대 이사장, 김석훈(金錫訓) 선생이 초대교장을 맡았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91일 구미농예중학교는 학년당 2학급씩 6학급으로 편성했다.

 

194979일 장천 오상중학교에서 선산, 오상, 구미 3개 중학교 학도호국대 사열식을 개최했다. 6·25에 앞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최된 학도호국대 사열식은 경북학도호국단장과 대구에서 갓 사단으로 승격된 육군 제3사단장 최덕신이 참석하고 선산군수, 경찰서장 및 관민 다수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청년 학도의 늠름한 기상과 정연한 훈련에는 모두가 감탄했으며 식을 마치고 시가행진을 했다.

 

1949 720일 구미농예중학교는 제1회 졸업생 75, 이듬해 55일 제2회 졸업생 63명을 배출했다. 이들의 명단은 동창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6·25 사변으로 피난길에서 죽기도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의 회고에 의하면 학도병으로 많이 입대해 전사했다고 한다. 국방부에서 편찬한 6·25전쟁사-5 낙동강선 방어작전에는 백선엽 장군의 육군 1사단이 낙동강 전투를 앞두고 인동초등학교에서 재무장을 하며 부대정비를 하던 시기, “학도병 500여명을 배속받았다(p118)고 기록돼 있다. 강을 건너온 구미의 중학생들이 여기에 속했으리라 짐작한다.

 

졸업생 중에는 결혼 1주일 만에 전사한 소위도 있었다. 얼마나 학도병으로 참전했으며 얼마나 전사했는지 알 수 없으니 더 비극이다. 낙동강 전선의 최일선을 담당한 인근 고장의 형편을 볼 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중학생들의 슬픔이 낙동강물처럼 시퍼렇게 멍들어 있을 것이다. 위령비를 남기지 못했으니 이 기회를 빌어 사람들의 마음에 위령비가 세워지기 바란다.

 

대구에 소재한 학교는 그나마 지원한 학도병들의 이름이나마 교정에 남겨 두었지만,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오상중학교에서 씩씩하게 사열받던 구미의 중학생들은 유학산에서, 다부동에서 봄꽃으로 피어나 가을풀로 시들며 눈을 감지 못하고 있으리라. 아버지들에게 조국광복의 첫 선물로 학교를 받은 중학교 신입생들이 졸업 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교육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역사이다.

 

6·25사변으로 구미농예중학교는 정규교사 및 가교사가 전소되었다. 195191일 구미농예중학교에서 구미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구미농예중학교 졸업생들이 국만의 선봉에 서서 의로운 목숨을 바쳤다면, 후배인 구미중학교 졸업생들은 세계적인 전자도시를 개척해냈다. 1920년대부터 숙원으로 쌓였던 부로들의 교육열이 장한 후배들을 키워냈던 것이다.

 

1980, 학교설립에 공로가 큰 윤숙현, 김상학, 김동성 선생의 공적비가 교정에 세워졌다

지비저널 기자  gbjou1638@naver.com
“”
- Copyrights ⓒ지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비저널 기사목록  |  기사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