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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옛 이야기 11> 각 면의 공립보통학교
2024년 02월 26일 [지비저널]

구미의 근대교육3 각 면의 공립보통학교

                                              -소설가 정완식

 

↑↑ 현재의 해평초등학교(출처 : 해평초 홈페이지)

1907년 해평면 월호리 기독교회 사립 영창학교(永昌學校)는 교인들이 경비를 부담하고 교장 윤상필(尹商弼), 학감 김의종(金義鍾), 교사 박철상(朴哲相)이 힘써 유지했다. 19103월 진급시험에서 지화룡(池化龍) 3명이 우등상을 받았다. 교인들이 경비를 부담해 교세가 발전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 듯하다. 학교를 유지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탓이다.

 

19103월 장천에서는 이우은이 면내 유지들과 협력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돈 60원과 교사를 기부했는데 김우락, 김유장, 박주필, 천기일 등 10여 명이 열심히 도왔다.

 

해평면의 사립 해서학원은 1910년대 말에 장지순이 설립해 150여 명을 수용했지만, 1922년경에 학교 유지가 곤란해 학생들이 지방을 순회하며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어려움을 타개하기 힘들었다.

 

1921년에는 고아면 원호동과 문성동에서 인습을 타파하고 신풍조를 받아 들이기 위해 청년 김교묵(金喬黙), 김현묵(金賢黙), 김재창(金載昌), 김승묵(金昇黙), 신기영(申起榮), 김용묵(金庸黙), 김규묵(金圭黙) 등의 발기로 선진학교 기성회를 조직해 1015일에 총회를 열고 김건용(金建容), 김세동(金世東)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기본금 4천 원 가치의 동민 공유재산과 2천 원의 의연금으로 초등, 고등 양 과를 설치해 아동교육과 중학예비를 강습할 목적으로 기성회를 조직했다. 마을에서 후세교육을 위해 돈을 냈지만, 지속 여부는 알 길 없다.

 

해평초등학교는 192259일 설립인가를 받아 1923518일에 2학급으로 개교했다. 학교 유지가 어려웠던 사립 해서학원을 공립교육으로 전환하려고 설립했을 것이다.

 

192456일 옥성공립보통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아 94일에 개교했다. 19270915일 장천공립보통학교도 개교했다.

 

1928년은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9월이 되자 학비 문제로 경북 각지의 공립보통학교의 퇴학을 신청한 학생은 1187명이나 됐다. 상주가 156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선산 역시 68명이나 되었다. 선산군에서도 해평면이 가장 피해가 심해 농민의 삶이 절벽에 몰렸다. 해평공보의 전교생 2백여 명 중 의식(衣食)은 물론 학용품과 수업료를 낼 수가 없어 절반인 1백여 명이 자퇴서를 내려고 했다. 당황한 학교에서는 퇴학신청을 낸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한편, 해평장학회와 협력해 2학기부터 학용품을 무상지급하기로 했다. 선산군에서도 911일 경북도에 수업료 면제 신청을 하며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퇴학 희망 학생들은 다시 등교해 수업 중이지만 흉년이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1929년도 연이은 가뭄의 피해가 큰 해였다. 97일 무을공립보통학교가, 910일 고아공립보통학교가 개교했다. 고아면과 무을면에는 4, 5백 명의 학령아동이 있었지만 학교가 없어 선산, 구미 두 학교로 통학시켜 불편과 장애가 많았다. 도청에 인가를 얻어 신교사를 건축 중이었지만 고아면에서는 제실을 빌어 가을학기부터 개학했다. 설립 당시, 고아공보는 구미공보 교장이 겸하고, 무을공보는 선산공보 교장이 겸했다.

 

큰 학교 교장이 작은 학교까지 관리를 겸했던 것은 1920년대 면 단위까지 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일본인 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서른 살짜리 교장이 수두룩했지만,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공립보교 교장은 학교업무는 물론 인근의 사설 학술강습소, 서당, 야학 등을 돌며 민족교육을 감시하고 일본어 교육을 권장하는 일본교육 확대의 최일선 감독자였다. 일제의 교육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폐교조치가 뒤따랐으니 보통학교 교장은 권력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장려, 색깔 옷 장려, 단발 등 사회변화를 위한 전도사 역할도 했다.

 

어린이를 위한 교육에도 신경을 쓴 시대였다. 193055일 고아공보는 전교 아동을 위해 동화회를 개최하고 교장이 취미로 연구하는 동화를 들려주며 어린이날의 의미를 깨우쳤다. 오후에는 학생의 모자(母姊)를 모아 아동교양과 애호에 대한 취지를 들려주며 55일을 아동애호일로 정한다는 선전물을 나눠 주었다.

 

1930년대는 ‘11가 완성된 시대였다. 19308월 도개면 유지들의 노력으로 학교 설립 준비를 한 후 경북도에서 인가원을 제출했는데 도개공보교가 16일에 인가되어 91일 가교사에서 개교했다.

1930118일 건축 중이던 고아공보의 신축낙성식은 교정 운동장에서 열려 마침내 학교로서 준비를 마치고 정식 학사를 시작했다.

 

1935101일 산동공보의 개교로 선산군도 ‘11제가 완성되었다.

 

지비저널 기자  gbjou16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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