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의 근대교육2 – 구미공립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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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구미초교의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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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면 최초의 근대교육은 1908년 6월 면내의 유지, 지도급 인사들인 장석홍(張洪錫), 현상홍(玄相弘), 이상근(李相根), 정대룡(丁大龍), 김기홍(金基弘) 등이 사립 선진학교(善進學校)를 세웠다고 한다. 학생을 모집해 나날이 늘어가는데 열심히 학교 유지를 위해 점차 확장해 실력있는 교사를 초빙할 계획이었다.
1909년에는 하구미면(下龜尾面) 상모동에서 지도 인사들이 동네에 측량학교를 설립하고 학생 4, 50명을 모집해 교사 원우일(元優壹) 씨가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측량학교는 당시에 설립이 성행했다. 1908년 1월 21일 공포된 「삼림법」 제19조는 “삼림의 소유자는 3년 이내에 약도를 첨부해 농상공부장관에게 신고하며, 신고하지 않으면 모두 국유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삼림약도를 그릴 수 있는 인력양성을 위해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측량학교가 생겼으며 심지어 가문(家門) 내에서도 설립했다.
국권을 상실한 후 철도의 노선변경이 이루어지며 일본인들이 구미에 들어왔다. 1915년, 그들은 먼저 심상소학교 설립을 위해 가교사를 사용해 일본 학생 12명을 임시로 수업시키고 학교조합을 결성했다.
조선인 학교가 없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1917년 8월에 요리점을 하는 신모의 딸 신호자(申好子)란 아이는 일본 아이들과 놀았는데 일본학교(심상소학교)에 가겠다고 졸라 집안에서 하는 수 없이 학교조합에 간청해 입학했는데, 매우 성적이 좋았다고 한다.
일본인의 심상소학교는 1918년 5월 2일에 낙성했다. 위치는 현재 구미초등과 산업도로 사이에서 왼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해방 후 구미중학의 교사, 1970년대까지 구미초등의 제2교사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후 모든 일본인의 행사는 심상소학교에서 개최되었다. 1918년 11월 1일 추계운동회는 우편소 신축 축하와 함께 이루어졌다.
조선인의 학교인 구미공립보통학교(현, 구미초등)는 선산군수와 이재기(李再基) 전 면장이 발기해 3·1운동 직후인 1919년 6월 11일에 설립인가를 받았다. 8월에 공사에 착수했는데 부지가 1천5백 원, 건축비가 1만3천 원, 부속건물 3천1백 원이 소요됐다. 지방비 보조 5천 원, 유지기부금이 9천5백 원이고 나머지는 학교부담금이었다. 이 교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잘 건축됐다는 평을 받았다. 그해 11월 30일부로 초대 교장 등본무길(藤本武吉:후지모도 부키치)이 부임했다. 학교건축을 위해 면장 김탁용(金卓容) 씨가 함께 힘을 쓰고 한마음이 된 면민들이 도왔다.
공사는 이듬해인 1920년 2월에 준공돼 24일에 개학했다. 공식 개교식은 23일에 있었는데 많은 내빈이 참석했고 학생들이 운동회를 개최해 성황을 이루었다.
구미공보도 첫 졸업생은 이듬해 3월 25일에 배출했다. 4년제 학교로서 설립된 지 1년 후에 1회 졸업생을 낸 것은 다른 사립학교 졸업생의 편입 또는 한학 수학자의 월반의 경우였을 것이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상희(朴相熙)가 1회 졸업생이었다고 한다.
학교 배치는 정문을 들어서면 현재와 같은 세 갈래로 나뉜 정원길이 있고 중앙에 본관이 있었다. 정원 좌측에 일자형 교사가 늘어서고 정원 우측에도 목조교사가 서 있었는데 197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학교 전체는 민가와 뽕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넓은 운동장에는 농구실과 돼지, 닭을 키우는 축사도 있었다.
1925년에 6년제로 승격됐고 1928년 2월에는 학부형들이 교육장려회를 창립했다. 이는 공보교육의 장려 무산아동 및 직업아동의 교육기관을 병설해 문맹 퇴치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를 거두어 사용했는데 이재기(李再基), 이종순(李鍾淳), 김수호(金琇鎬), 김정득(金正得), 최해수(崔海守), 김기찬(金基燦), 김영덕(金永德), 김교주(金敎冑) 씨 등이 주도했다.
1930년 1월 4일 학교 강당에서 송원옥(宋源玉) 외 동창 30여 명이 모여 동창회를 다시 소집하기로 결정했는데, 동창회는 1회 졸업생이 졸업 초기에 만들었지만 침체상태였다. 이때 임원을 선출했다. 임원진은 송원옥(宋源玉), 권재호(權在鎬), 김규묵(金圭黙), 박상희(朴相熙), 김○설(金○卨), 윤우병(尹愚柄) 등이었다. 초기 졸업생들로 보인다.
동창회는 4월 3일 오전 10시에 개최돼 각지에 나간 동창들도 많이 참석했다.
공립보통학교는 넓은 운동장이 있어 고장의 큰 행사나 체육행사는 모두 개최하는 장소였다. 1930년 8월 <조선일보>와 <중외일보>가 후원하고 유학생친목회가 주최하는 제2회 남선정구대회가 선산공보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교통이 불편해 구미공보로 변경되기도 했다.
1928년과 1929년의 극심한 가뭄으로 가난한 무산아동이 증가하자 1931년 1월 교장 석천호일(石川好一)과 교원들이 무산아동과 학령초과 아동을 위해 특별야학부를 설치했다. 이 해에는 1백여 명이 가까운 학생들이 줄어들었다. 특별야학부는 문맹계층에 일본어를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1930년대의 농촌사회에 일본통치를 용이하게 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25일에 제11회 졸업식이 개최되고, 상모동의 박정희(朴正熙) 학생이 무사히 졸업했다.
잇단 자연재해로 1932년에는 6백여 명에 달하는 학생 중 전년에 많이 감소하자 경북도에서 9학급을 8학급으로 단축시킨다는 명령이 내렸다. 진정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가 교사들이 가정방문까지 하며 모은 신입생 180여 명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기도 했다. 그나마 신학기에는 수업료 때문에 쫓겨나는 학생들이 학년별로 10여 명에 가까운 형편이었다. 때문에 농가 부업으로 왕골슬리퍼 제작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에 직업과목을 설치하기도 했다.
1935년 10월에는 설립 15주년 기념사업으로 아동도서를 준비하기 위해 교장 삼금일(森金一)과 학무위원이 총동원되어 기부를 받아 의연금을 3백여 원 모집했다.
해방 직후 혼란한 와중에 구미국민학교는 10월 1일 배영도(裵永度) 선생이 교장으로 승진해 발령받았다. 1905년 비산동 출신인 배 교장은 경남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부터 근무한 적이 있었다. 1945년부터 1957년까지 12년간 교장으로 근무하며 해방 후 혼란기와 6·25 후의 잿더미에서 학교발전을 이끈 공로자이다. 실로 구미국민학교를 정상으로 올려놓은 아버지 역할을 해낸 분이다.
1950년 9월 10일 6·25 사변으로 교장실과 직원실, 교실 14개가 전소되고 3개 교실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10월 1일에 수복 후 복귀하여 8일에 개교한 후 이듬해 초까지 대파된 교실을 수리하고 8개 교실을 신축했다. 이어 CAC 후원으로 2개 교실을 신축하고 1952년까지 교장실, 직원실을 새로 지어 대체적인 복원을 하게 되었다.
구미초등학교 역시 1백여 년의 역사를 쌓아오며 조국 근대화의 고장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들을 길러 현장에 내보낸 역사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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