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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옛 이야기9> 선산공립보통학교
2022년 02월 21일 [지비저널]

구미의 근대교육1 - 선산공립보통학교

                                  -소설가 정완식

 


갑오개혁 이후 제도의 근대화와 더불어 근대교육도 시작되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설립되던 관공립 및 사립학교들은 을사년의 외교권, 내정 침탈을 계기로 자강, 계몽운동에 힘입어 실력배양 운동으로 전국에 사립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1905년에 일제 통감부는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수업연한을 6년에서 4년으로 줄였다. 이후 각 지방은 학교설립의 붐이 일어나 지방의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사립학교가 속속 설립되었다.

 

선산초등학교의 전신인 창선학교(彰善學校)는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설립되었다. 『선산초등100년사』를 보면 1906년 이우직(李愚稷)의 주재로 학교창립을 발의해 강시갑(康始甲) 외 수십 명이 참석했고 장소는 현재 축산조합 부근이었다고 한다. 교사는 윤태진 외 4명이며 선산화수정(면사무소 뒤)에 교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1908년 5월 29일 자 <황성신문>에는 심광택(沈光澤), 이우직 등 여러 인사들이 제정을 준비해 창선학교를 만들고 교과서 수백원 어치를 사들이고 윤태진 씨를 교사로 초빙해 청년자제를 교육한다고 보도되었다. 2년의 차이가 난다.

 

6월 초에는 창선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교사를 초빙해 개학중이라며 장지명(張志明), 이우직, 김상기(金相基), 김윤형(金胤亨), 박민환(朴珉煥), 이윤옥(李潤玉), 김홍직(金泓直) 등 여러분들이 힘을 냈다고 했다. 이때 개학 중이라 했으니 아마 수업을 계속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발기인인 심상건(沈相健), 이상우(李相宇) 등이 대한협회로 편지를 보내 개교식에 김광제(金光濟) 선생을 연설원으로 요청했다. 수업을 계속한 것과 달리 개교식은 많이 늦은 셈이었다.

의병 활동과 일본화폐 유통 반대, 친일파 배척, 사립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펼친 김광제 선생은 대구에서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사장으로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고, 부사장 서상돈(徐相燉)과 함께 2월 21일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國債一千三百萬圓報償趣旨)」라는 문장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함으로 국채보상운동을 부르짖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호응을 얻어 전국 운동으로 퍼져나가, 황제로부터 백정에 이르는 전 국민이 참여해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 중 가장 중요한 국민운동이었다. 김광제 선생은 1910년 국권피탈 직후까지 대한협회에서 지부설립과 강연 활동을 쉬지 않았다.

창선학교 발기인들이 김광제 선생을 초청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1907년 3월에 선산군의 강상원(康相元)이란 청년이 을사오적인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살해하려고 상경했다가 체포될 정도로 울분이 들끓었다. 선산에서도 국채보상운동의 모금이 활발했는데 전 중추원 의관을 지낸 심정섭(沈廷燮)이 중심이 되고, 정언 벼슬을 한 강시갑의 부인 강(姜) 씨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은비녀와 은반지, 엽전 10냥을 의연하는 등 많은 군민이 참여했다. 선산군에는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가 조직되고 허모 씨가 국채보상 광고문을 살포했을 정도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립 창선학교 개교식에 김광제 선생을 초빙해 학생들에게 국가관과 정신을 발흥시키는 연설을 기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08년 7월 1일 사립 창선학교가 개교했다. 김광제 선생 역시 참석했지만 무슨 주제로 강연했는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김천의 광흥학교의 경우를 보면 유추해볼 수 있다.

바로 전 해인 1907년 3월에 김천에서는 안덕일(安德一), 문하영(文夏永), 박동윤(朴東潤), 김도홍(金道洪) 등이 김천 사립광흥학교(私立廣興學校) 설립작업을 한 바 있다. 1908년 7월 2일 자 <황성신문>은 김광제 선생이 선산에서 개령 등 각 학교에 초청되었다가 돌아가는 길에 김천 광흥학교에서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학교에 들어가니 학생이 50여 명이고 노동야학생이 40여 명이 있어 “국가 정신이 교육에 있다”는 주제로 연설했다.

사립 창선학교에서도 비슷한 주제로 학생들에게 정신교육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창선학교는 1908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크게 발전했다. 교감 이우직 선생, 김상기 두 사람이 침식을 잊고 교무에 몰두한 결과 군내 인사들이 크게 칭찬하는 한편, 학생도 90명에다 노동자 92명이 입학해 주·야과가 상당히 활발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많은 인사들이 찬조를 하고 군의 세무수장 김창식(金昶植), 주사 조근식(趙瑾植), 법률사무원 안인식(安麟植)도 돈을 내어 도우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10월 김창수(金昌洙) 군수는 도임한 후 많은 모함을 받았다. 학부 명령을 빙자해 객사를 수리해 학교를 옮겨야 한다며 8백 원을 민간에 가렴해 민원이 크게 일어나고 학교 임원들도 해체되었다는 말이 무성했다. 설상가상으로 순흥군수 재임 때 국채보상금 1천여 원을 민간에서 모아 수금소로 한 푼도 올려보내지 않고 학교설립을 하겠다며 10여 명을 모아 읍내 5리 밖에 있는 공공건물을 수리해 교사로 삼아 몇 달간 허송한 후 돈을 전부 몰수해 순흥 사람들이 상경해 내부에 호소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실은 김창수 군수가 창선학교의 상황을 조사하고 교사를 옮기는 작업과 교과개정에 열성을 가지고 일했다. 주사 장지명(張志明)과 교장 이우직, 교감 김상기의 열정에도 교사가 좁아 모두 수용할 수 없자 군수는 객사 수리에 착수했는데 세 사람과 함께 아침 일찍 나와 직접 인부가 되어 일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객사를 고친 교사는 1909년 1월 초에 준공했다.

학교가 발전을 거듭하던 중 1909년 하반기에는 또 4백 원 남용 모함을 받았다. 교사를 신축한다며 돈을 쓰는데 군수가 4백 원을 제멋대로 써서 교사의 월급을 몇 달 주지 못해 곤란한 지경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군수가 남용은커녕 몇백 원을 스스로 내어 열심히 도왔던 것이다.

 

1910년 이후 보통학교는 대개 사립보통학교를 공립으로 변경하고 수학 연한도 4년제였다. 조선인에게는 중등,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초등교육으로 끝내 충량한 신민의 양성과 저급한 노동계급의 육성이 목표였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정상화 된 사립 창선학교는 1910년에 1회 졸업생 남자 15명을 배출했다. 4년제의 졸업이라면 1906년 입학생인 셈이다. 1906년 창립설이 거의 정확한 듯하다. 그러나 다른 변수는 한학을 한 후 입학한 학생이 2, 3학년에 입학했을 경우 창선학교의 설립 시기가 좌우될 수 있다. 1회 졸업생의 학적부를 보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개인정보라 직계비속이 아니면 열람이 불가능해 알 수 없다.

1910년 6월 30일 사립 창선보통학교는 설립인가를 마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1911년 7월 25일 선산공립보통학교가 총독부의 인가를 받자 8월 31일에 폐교되고 이튿날 선산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조선어 대신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다.

이 무렵의 학교는 군청 소재지의 경우 대체로 거의 모두 공립화된 시기였다. 1군1교시대였다.

선산공립보통학교는 1921년에 6년제로 승격되었다.

선산에는 일본인 학교인 선산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지만 설립과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근대교육은 이처럼 선각자와 부형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백 년이 넘는 역사를 거치며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쳐야 했던 암울한 시대도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라도 배우고 익혀 국가와 사회에 내보내 큰 역할을 하는 인재들로 썼다. 선조들의 노력에 부끄럽지 않은 1백 년 역사였다.

참고로 1909년 초 김천에는 사립 광흥(廣興), 양성(養成), 보명(普明), 광진(廣眞)학교 등이 있었다.

 

지비저널 기자  gbjou16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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