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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옛 이야기8> 구미 씨름과 장사 윤봉은(尹鳳殷)
2022년 02월 14일 [지비저널]

구미 씨름과 장사 윤봉은(尹鳳殷)

                         -소설가 정완식

 

씨름은 특별한 도구가 없이 힘과 기량만으로 겨루는 원초적인 스포츠이다. 지위와 신분을 구별하는 옷을 벗어 던진 채 오직 힘을 쓰니 양반도 상놈도 구분없이 모래판에서는 오직 사나이끼리의 승부만 있었다.

영남은 씨름이 성하고 많은 장사들도 배출했다.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은 김천이 씨름으로 유명했다. 아랫장터 감천변을 중심으로 오랜 옛날부터 많은 장사들이 모래를 피워 올리며 힘과 기술을 겨루었는데 장관을 보려고 구름같이 군중들이 모였다.

 

일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꺼리는지라 1926년 순종 승하 무렵에는 씨름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축구나 야구가 시골까지 널리 성행되지 못해 전통스포츠인 씨름은 자신의 고장을 알리고 많은 사람이 찾아들어 경제가 활성화되고 홍보효과도 탁월했다. 그래서 단오, 추석이나 낙성식 같은 큰 행사에는 으레 씨름대회가 벌어졌다.

 

구미 역시 그에 버금갈 정도로 씨름을 많이 한 고장인데 근래에 들어 천하장사에 오른 이태현, 장성우와 백두장사 가마를 탔던 고 박영배, 여자 천하장사 엄하진 등의 쟁쟁한 스타들도 배출했다. 구미중, 현일고는 물론 구미시청도 씨름팀을 운영하며 구미 씨름의 맥을 잇고 있다.

 

윤봉은(尹鳳殷)은 해평면 낙상동 출신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전국의 씨름판에 출전했다. 1927년 5월 하순 인동(仁同)에서 열린 씨름대회에 출전한 23세의 윤봉은은 두어 시간 동안 인동의 김인오(22)와 붙어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씨름판에 이름을 걸었다.


1928년 영동교 천변에서 열린 영동씨름대회는 각지에서 모여든 선수와 수천 명의 관람 아래 중등(中等) 결승전에서 영동의 손무현을 이기고 우승한 후, 다음날 상등(上等) 결승전에서도 김천의 백준기를 이기고 우승했다. 이어 벌어진 대전대회에서는 중등씨름에서 윤봉은이 우승하고 상등 씨름에서 역시 선산의 김성화(金聖化)가 2위를 했다. 8월에는 김천대회도 열렸는데 여기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30년 8월 말에 대전 대전천변에서 열린 대전씨름대회에서 윤봉은은 대전경찰 맹해성에게 져 송아지 한 마리를 탔지만 9월 초 대전 제2소학교에서 열린 씨름대회에서는 첫날에 윤봉은이 농우(송아지) 한 마리, 이튿날에는 농우(황소)를 타며 기염을 토했다. 하순에 감천 모래사장에서 열린 김천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3개 대회에서 4마리의 소를 차지했다.


이 해에는 구미에서도 씨름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2위는 원평동의 22세난 이수봉(李壽奉)이 차지했다. 이때가 윤봉은의 전성기였다.

이 무렵의 씨름선수들은 열차를 타고 대회장을 찾아와 안면있는 선수들과 어울려 술잔치를 벌이다 자신의 차례가 오면 출전하곤 했다. 상품은 대개 우승자는 황소, 준우승자나 총각씨름 우승자는 송아지, 3위는 광목이었다. 우승해도 끌고 가지 못할 소를 팔아 그동안 장사들과 어울려 마신 술값을 내고 나면 빈 고삐와 여비 정도가 남으니 윤봉은이라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1931년 대전대회에서는 8월 30일 중인(中人)에서 우승해 송아지와 우승기를 타고 둘째 날에 대인(大人)에서 대전의 맹해성에게 패해 준우승 송아지를 탔다. 이것을 보면 윤봉은은 최중량급이라기보다 기술씨름을 한 중량급(中量級)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1932년 6월 제5회 전조선 씨름대회에 출전한 윤봉은은 첫판에서 경성전기의 권억만에게 패했다. 해평면이 아니라 철도 소속이어서 아마 철도회사에 스카우트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실업선수인 것이다. 8월의 대전대회에서 3위를 한 윤봉은은 영동대회에서 우승해 황소를 차지했다. 9월에는 사흘간 열린 조치원 대회에서 이틀간 잇달아 우승해 황소 두 마리를 차지했다. 부지런히 대회에 출전했던 셈이다.

1933년 영동대회에서는 2위로 송아지(대금 15원)를 차지했다.

1935년 8월의 조치원 대회에서는 둘째 날에는 2위, 마지막 날에는 우승했다. 이때 훗날 대구의 “장군”이라 불리던 유명한 씨름꾼 나윤출(羅允出)도 출전해 첫날 2위를 했다. 9월의 조치원 대회에서는 4위를 하며 32세의 윤봉은도 약간 쇠퇴하는 듯했다.


윤봉은의 뒤를 이은 선수는 안덕세(安德世)이다. 그가 처음 나타난 기록은 1942년 평양의 전조선씨름대회였다. 안덕세는 예선에서 이기고 준준결승에서 대회 우승자인 평양의 최장호에게 지고 말았다. 최장호는 대구의 나윤출을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 황주의 송병규를 이기고 우승했다.

그해 김천에서 열린 전국씨름대회는 전국의 씨름 고수들이 모여든 가운데 당시 최강이던 김천의 윤삼출이 우승했는데 안덕세도 출전했지만, 수상 여부는 알 수 없다.


1946년 4월에 대구에서 열린 전국씨름대회에 출전한 안덕세는 나윤출이 우승한 그 대회에서 4위에 올랐다. 그해 대구에서 다시 열린 전조선씨름대회에서 2백여 명이 출전한 가운데 안덕세는 전국 최강자이던 대구의 김상영을 꺾고 우승했다.

구미에서 열린 전조선씨름대회에서는 대구의 이석도와 김상영이 무려 6시간 동안 겨루었지만, 무승부로 마감했다고 한다.

1947년 9월 12일 선산에서 열린 남선씨름대회는 연일 뜨거운 경쟁을 거듭하며 6일간 치렀는데 개인전에서 안덕세가 1위를 하고, 면대항 단체전에서 선산면이 우승을 차지했다.


국권을 잃은 암울한 시대, 가뭄과 장마가 흉년을 몰고 와 살길 없던 시대에 윤봉은은 구미인의 이름을 안고 전국의 모래판을 누볐다. 그는 구미인들의 굳센 힘을 어깨에 짊어진 영웅이었다. 삼남의 씨름판에서 샅바를 잡으며 그가 떠올렸던 것은 낙동강의 너른 모랫벌이었으리라.


그 후 대구와 김천에서 전국을 뒤흔든 유명한 장사를 내는 것을 보며 시민들은 많이 아쉬워했다. 전철수, 박육근, 이중원, 강기영, 김상근, 이승만, 강시후가 구미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국대회에서 강시후를 제외하면 신통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화 감독이 키운 이태현, 박영배가 황소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 기뻐했던 것은 구미의 뚝심을 발휘했던 카타르시스가 아니었을까. 박영배가 거인 김영현과 최홍만을 꺾을 때 구미시민은 환호했고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뚝심의 아들이 꺾인 슬픔에 잠겼다. 

지비저널 기자  gbjou16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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