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희망은 청년의 특권
-소설가 정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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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2일 금오산, 다시 한 번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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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과 입춘이 지나 봄이 코앞에 와 있다. 새 학년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코로나로 불안한 상황이다. 학생들도 백신을 맞아야 한다니, 부작용이 없기만 바랄 뿐이다.
출산율이 현저히 떨어져 나라의 희망이 줄어들어도, 어려운 시기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청년들이 있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놓을 수 없다. 온갖 고난에도 꺾이지 않고 꿈을 현실로 바꿔 가는 용기가 있어 청년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다.
선산군의 스무 살 난 노재연(盧在鉛)은 1906년에 보성학교(普成學校)에서 공부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경제적인 문제였다. 군청 주사에 지원했지만 결과가 불공정함을 느껴 내부(내무부)에 청원해도 기각되었다. 그는 내부협판(내무부차관) 최석민(崔錫敏)의 집으로 찾아가 호소하며 이유를 설명하자, 최 협판이 말했다.
“군은 묘령의 나이로 학문에 힘쓰면 앞길이 만리여서 큰 벼슬을 할 수 있거늘 어찌 하찮은 군청 주사 때문에 이리하는가?”
“학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으나 형편 때문에 먹고 잘 데가 없어 봄에 보성학교에서 공부하다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최 협판이 상황을 들어보니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생겨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지정해 수업케 하고 의식을 해결할 길도 마련해 주었다. 후일 친일부역자로서 이름을 올린 최석민이지만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야 다르겠는가.
가난에 절망하던 광평동의 소년 신갑석(申甲石)은 조선을 여행 중이던 오사카의 서양과자 제조업자 당교(唐橋, 가라하시)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을 따라 1918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과자공장의 견습직공이 된 신갑석은 1921년 4월 그곳 소학교의 야간부에 찾아가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천성이 유쾌한 신갑석은 다른 직공보다 두 시간쯤 일찍 출근해 기계를 손보고 원료를 준비하며 열심히 일한 다음 퇴근하고는 남보다 일찍 등교해 나무에 물을 주고 먹는 물을 길어놓고 청소를 한 후 교실에 들어가 자습했다.
워낙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터라 소학교 야간부에 들어간 그해 4학년까지 월반하고 5학년이 되어 반장이 될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신갑석의 피나는 노력은 혼자만 바꾼 게 아니라 직장에서도 분위기를 성실하게 바꾸고 학교 교우들도 그의 거짓 없는 행동을 따르게 되었다. 조선인으로 낮에 일하고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며, 거침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함으로써 일본인의 선입관을 완전히 바꾸었다. 힘들여 모은 수백 원을 밀양 등지로 떠돌던 부모와 누이에게 보내 고향 땅에 정착하도록 했다.
신갑석은 1921년 오사카 남구의 포장을, 학교의 표장을 받았다.
노재연이나 신갑석은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간, 어찌보면 행운도 따랐던 사람들이었다. 1936년 이후 청년들은 비극적인 길을 걸어야 했다. 창씨개명으로 성을 바꿔야 했고, 상급학교를 진학하려 해도 실업계를 거쳐 잘 되어봐야 하급관료가 고작이었다.
국내의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도 만주국의 학교뿐이었다. 시대흐름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대 요소인지라 인재를 활용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비극이었다. 조국을 지키는 전선에서, 경제발전의 현장에서 배운 바를 쓸 수 없었던 개인의 비극이기도 했다.
선산면 북산동의 최명하(崔鳴夏)는 진학하기 위해 다케야마(武山)으로 창씨한 후 1939년에 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동남아로 배치된 최명하는 우수한 비행술로 가토 소장의 신임을 받아 동료 편대에 들어갔다. 페낭 등지의 공중전에서 용맹을 발휘한 그는 1942년 수마트라섬의 바칸발 비행장에 출격해 수십 기를 격파했다. 그러나 자신의 비행기도 탄환에 맞고 얼굴과 왼편 다리에 부상을 당해 불시착한 후 원주민에게 구출되어 구호를 받던 중 포위공격을 받아 권총으로 응전하다 자살로 생을 마쳤다.
최명하, 고 다케야마 대위는 고향의 모교 교정에서 군수가 제주가 되고 경찰서장이 장의위원장이 되어 군민장으로 장례를 치렀지만, 후세에 자랑스럽다고 할 수 없었다. 일개 중위를 두고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겠으나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할 전쟁에서 죽지 못했으니 시대를 잘못 만난 비극이자 키워 낸 고장의 불행이었다.
면 단위의 작은 시골에서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굽힘 없이 나아갔던 청년들은 꿈을 이루었다. 꿈이 관료, 교육자이든지, 과자제조업이든지, 침략군의 조종사이든지 자신이 배운 바를 펼쳤다.
6·25를 맞아 낙동강 전선에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동창회마저 조직하지 못할 만큼 전사자를 냈던 우리 고장 중학생들의 비극이 뒤따랐다. 가장 불행했던 이 세대의 꿈은 전사(戰死)가 아니었으리라. 최명하보다 더 시대를 잘못 만나 여름 이슬로 사라져간 그들의 슬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뒷세대 청년들은 모래벌판을 일구어 세계 속의 구미로 우뚝 세웠으니 자기 세대의 꿈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구미 역사가 기억해야 할 최대 공로자들이며 꿈을 펼친 세대였다.
과거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은 시대여서 더 많은 인재가 자라났다. 공부는 물론, 예술, 과학, 운동 많은 분야에서 구미의 청년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도전은 청년의 특권이다. 새봄이 다가오면 다시 학년이 시작된다.
입춘을 지나며 구미 청년들의 꿈을 향한 힘찬 전진을 마음으로 축원한다. 그들에게도 20년이 지나면 그렇게 높고, 숭고해 보이던 꿈이 곁에 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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