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衡平社)와 면민 사이의 분규
-소설가 정완식
도축을 직업으로 하는 백정은 조선시대까지는 천민계층이었지만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차별이 여전해 기와집에 거주하거나 비단옷을 입지 못하고 외출 때는 갓이 아닌 패랭이를 써야 했고, 장례 때 상여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교회의 예배나 학교의 수업은 물론 거주지도 평민들과 달라야 했다. 민적에도 신분이 표시되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는 신분의 급격한 변동이 시작되었다. 그런 시대에 여전히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1923년 4월 진주에서 양반들이 백정의 신분해방을 부르짖으며 형평사를 설립했다. 형평사는 전국에 지사와 분사를 두며 조직망을 형성하고 다른 사회단체와 협력하며 전국운동으로 퍼져나갔다.
구미형평사 분사는 1926년 2월 18일 오전 11시에 70여 명의 사원들이 풍악을 앞세우고 시위행렬을 했다. 3월 24일에 창립총회를 가지고 분사장 배운용(裵雲龍), 서무부 강전(姜電), 교양부 조암우(趙岩祐)와 배영광(裵榮光), 선전부 박춘성(朴春成), 배운기(裵雲起) 등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해 출범했다. 이들의 신분이 지식청년인지 백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박상희(朴相熙), 윤재우(尹載佑), 황석호(黃石瑚)가 참가하던 구미청년회와도 연계를 가졌다.
1926년 4월 11일 오후 1시 무렵에 형평사원들과 청년, 보통학생들 수십 명이 충돌해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면내 분위기가 사뭇 긴장되었다. 김천과 성주의 형평사원들이 지원차 구미로 왔다.
1926년 4월 25일에 순종이 승하하자, 전국적으로 슬픔에 잠겨 전국적으로 창덕궁을 향해 망곡식(望哭式)이 퍼져나갔다. 구미에서도 4월 30일 오후 4시가 되어 장터 뒤편 구미천변 광장에서 2천여 명이 모여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 속에서 망곡식을 열고 있었다. 그때 식장 옆에 서 있던 형평분사 서기 강전이 못마땅해서 한마디 던졌다.
“우리는 5백 년 동안 전제 치하에서 유린을 받았는데 지금 망곡까지 하는 건 너무 심한 일이다.”
엄숙하고 슬픈 식장이라 주위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강전은 생각이 달랐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는커녕 등골만 빼먹다 죽은 왕가를 슬퍼할 까닭이 무어란 말이오?”
보다 못한 성급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이 자리에서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게냐? 천한 백정 놈이!”
“무어? 천한 백정?”
갈등의 원인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거리가 멀어 참여할 수 없어 곡을 하며 문상치레를 하는 자리에서 망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평가는 옳지 않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있었다. 더구나 죽은 사람은 이유야 어떻든 황제가 아니었던가?
강전의 입장에서는 신분으로 귀천을 나눠 천한 계층만 국가를 위해 희생시킨 왕이 죽었는데 굳이 곡까지 하며 상주노릇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가장 천한 삶을 살아온 백정으로서는 원수와 다름없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신분의 차이였다. 사람축에 끼이지도 못할 축생같은, 머리에 쇠똥도 안 벗겨진 백정 놈이 감히 ‘어른’들이 모인 국상 자리에 나타나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를 지껄이니 후려갈기려는 마음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강전은 세상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 에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느냐는 것이다.
피차 불쾌한 언성이 잠시 오가는가 싶더니 누군가 강전의 뒷덜미를 잡아 땅바닥에 팽개쳤다.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길질하며 집단구타를 해댔다. 말리려는 사람들도 소란에 휩쓸려 들어가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참 동안 소란이 일던 식장은 순사들이 몰려오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몰매를 얻어맞은 강전은 인사불성이 되어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중이었다. 몇몇 사람이 축 늘어진 강전을 형평분사장 배운룡의 집으로 떠메고 가서 뉘었다.
흥분한 시민 4, 50명이 군중을 일으키려고 소리쳤다.
“축생 놈들이 신성한 자리를 더럽혔는데, 그냥 두고 볼 것인가?”
순식간에 장내의 군중들이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형평분사 놈들을 모두 박살내자!”
“가자! 백정 놈들을 때려죽이자!”
면민들이 기세등등하게 몰려가는데, 정·사복 경찰들이 가로막았다. 경찰들은 흥분한 면민들을 자제시키려고 경찰서장이 모두에게 진정하라고 요구했다. 가로막힌 군중들은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경찰의 제지를 듣는데 강경파는 여전히 분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박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급보를 받은 김천, 개령, 선산, 약목, 왜관 등지의 형평사원 백여 명이 몰려왔다. 그들도 경찰의 제지를 받은 가운데 작전계획을 숙의했다. 그러는 동안 면민들은 4, 5천명이 가세하고 형평사원 역시 수효가 불어났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로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박 면장이 양쪽을 화해시키려고 일단 해산을 권했다.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면민쪽에서는 쉽게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행동을 취하려 했다. 면장은 간곡한 목소리로 면민들을 설득했다.
사람이 다치고 숨이 곧 넘어갈 듯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양쪽의 숫자도 많고 흥분이 가라앉아 면장의 제지가 주효해 우선 군중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해산은 하지만 언제 다시 불이 붙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불씨를 안고 있었다.
면장은 호별로 면민들을 방문하거나 직접, 간접으로 자제를 권하며 서로 화해를 붙였다. 면장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일주일 만에 면민들의 감정은 누그러졌지만, 형평사원들과는 결코 상종하지 않겠다는 여론이 퍼졌다. 물론 소고기 불매동맹을 실행하기로 했다.
면민들과 형평사원들 사이는 물과 불이 되어 말까지 섞지 않게 되어 절교하게 됐으며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형평사원과 동류로 취급하기로 했다.
형평사 운동은 조선의 관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대여서 일반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또 일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른 사회운동과 제휴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어 시련을 받았다. 그러나 반제국주의적, 반봉건 신분해방의 성격을 지녔다. 형평사는 1930년대 들어 일반 사회운동의 저조로 활동이 축소되었다.
형평사와 면민들의 갈등은 1980년대까지 연세 높은 부로들이 기억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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