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과 성왕의 최후
-정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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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의 서문(충복보은방면 2021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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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을 지키는 도도(都刀)는 친구인 부하들과 망루에서 멀리 백제와 고구려, 한강으로 이어지는 지세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눈길은 먼지를 일으키며 들판을 달려오는 기병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관산성이 바람 앞의 등잔불 신세야. 출발준비를 시켜라!”
하급장교가 계급이 한참이나 높은 도도의 말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쌓은 성을 지키는 게 우리 임무야. 그러나 때가 왔군.”
사실이었다. 비록 신라군은 서산성에서 대패했지만 김무력(金武力)의 한강 방어병력이 남하 중이었다. 백제 역시 태자 부여창은 부왕이 소집한 왜, 가야의 병력을 기다리느라 고리산성에 앉아 대규모 진공을 하기 힘들었다. 도도는 삼년산성에서 당장이라도 출전할 태세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부하는 성안을 향해 출격을 알리는 깃발을 흔들었다.
군대에 묶여 전선을 돌며 타향에서 청춘이 늙어가는 그들이었다. 당초 김무력이 할아버지를 찾아왔을 때부터 예견된 운명이었다. 60여 년 전 삼년산성을 고쳐 쌓을 때 일선(一善)에서 장정 3천 명이 동원되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요새로 만들었다. 그때 젊은 공사책임자였던 할아버지에게 성의 구조를 알고 싶어 찾아온 사람이 젊은 장군 김무력이었다. 가야국의 왕족 출신이지만 빈손이나 다름없어 귀순한 나라에서 군공을 세워야 하는 김무력은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고구려와 국경이던 우리 일선에는 몇 해 동안 흉년이 들었소. 왕께서 납시어 친히 백성을 위로하고 구휼했소. 우리 고을 장정들은 자진해서 국경으로 성을 고치러 갔소. 3천명이 갔는데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를 몇 해 동안 고쳤지요. 비록 농사는 아낙네와 노인들이 지었지만, 나라에서는 우리 노고를 알아주어 조세를 받지 않았소. 삼년산성은 서쪽으로 백제를 막고 북쪽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막은 후 힘이 생기면 사방으로 치고 나갈 최전선 진지라오. 그곳을 잃으면 곧장 우리 일선이 뚫리게 되고 서라벌까지 단숨에 함락되니 이 나라는 내일이 없소. 장군이 나를 찾아온 까닭은 짐작하오만…… 바늘 하나로도 백만대군을 지켜낼 수 있는 곳이라오. 배신자만 없으면 바람도 들어올 수 없으니 명심하시오."
그날 열여섯 살의 도도는 자신을 향해 웃는 김무력의 뒤를 따라 친구들과 부대를 이루어 종군길을 떠났다. 전마를 돌보며 마구간에서 말의 치료와 육성, 응급처지 등을 익히는 초급 기병인 사양노(飼養奴)였다. 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스무 살이 되자 고삐를 잡고 천리 전선길을 달렸다.
이 무렵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지만 4년 전(551)부터 한층 격화되었다.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막았다. 고구려는 북쪽으로 돌궐을 무사히 막아냈지만 한강 유역을 잃었다.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하고 신라는 강원도로 치고 올라갔다.
청년이 된 진흥왕은, 탁월한 정치인이자 천재 군략가였던 이사부(異斯夫)가 닦아놓은 영토 확장의 토대 위에 거대한 꿈을 피우려 했다. 진흥왕의 친정체제 구축과 함께 은퇴한 이사부의 뒤를 이은 사람은 백전노장 거칠부(居柒夫)였다. 거칠부는 김무력을 한강유역 공략의 선봉에 세웠다. 고구려가 정치적 내분과 북방의 침입에 정신이 팔린 사이 신라는 10여 개 성을 차지하고 작년에 한강 유역 전체를 장악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김무력의 유격부대인 도도와 친구들은 피보라로 온몸을 적시고, 먼지로 세수하며 생사의 경계에서 전장을 누볐다. 함께 간 친구들이 하나씩 힘이 다해 일어서지 못한 채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다. 살아남은 친구들은 죽어간 친구들이 남겨준 힘과 용기를 얻어 군관이 되고 마침내 전마에게 한강물을 마시게 했다.
백제의 성왕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내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며 영토가 길어지자 상대적으로 허리 부분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전략이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갈등하도록 놔두면서 가야지역의 옛 병력, 왜와의 연결을 통해 연합군을 구성해 곧장 서라벌을 노린다는 속셈이었다. 신라를 안심시키려고 작년 겨울에는 딸을 진흥왕에게 보내기도 했다. 겉으로는 나제동맹이 굳건하게 보이도록 했다.
겨울에 들어서자 김무력은 도도를 불렀다.
"여기 전선은 비교적 안정되었으니, 병력 일부를 데리고 삼년산성으로 가거라. 내년에는 백제가 우리의 허리를 칠 것이다. 백제가 전력으로 진공하면 관산성이나 굴산성은 버티지 못한다. 삼년산성마저 무너지면 바로 상주, 일선이 뚫리고 우리의 국토는 순식간에 양단되니 나라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도도는 살아남은 일부 친구들과 약간의 병력을 나눠받아 삼년산성으로 왔다. 서릿발이 깔린 삼년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촉도난 같은 오솔길이었다. 성루에 올라서자 도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침입하는 적은 병력을 전개할 수도 없이 한 줄로 기어 올라와야 했다. 산중턱에 쌓아 올린 성벽은 수비병력을 마음대로 전개하기 편하도록 넓었고 두꺼운 만큼 깨트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각 성문의 설계는 애당초 날개 없이는 쳐들어오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개(萬夫莫開)의 철옹성이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바늘 하나로도 백만대군을 지켜낼 수 있는 곳’이라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실감했다.
도도는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해가 바뀌고 올해(554년) 백제 성왕은 애송이(?) 진흥왕을 깨트리려고 대규모의 군사를 일으켜 관산성으로 몰려왔다. 나제동맹은 빛바랜 종이 조각이 되었다.
관산성 쪽 노을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노을을 등지고 산길을 걸어 한 사내가 올라왔다. 도도는 이내 사내의 몸짓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옆의 친구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비병력을 제외하고, 출발한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들어선 사내는 성안의 해자가 된 연못을 등진 채 서 있는 도도를 얼싸안았다. 그런데 당연히 출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부대가 보이지 않았다. 도도가 귀에 대고 말했다.
“너그 할아버지와 내 할아버지가 판 저 연못에서 신병들이 나올 게다.”
연못과 성벽과 나란한 바위산 사이 오솔길로 병사들이 어둠을 뚫고 병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성문 안에는 병사들이 도열할 위치도 없어 이내 도도가 진군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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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의 동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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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열고 말고삐를 잡은 병력이 그림자처럼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함께 내려가는 동안 천리를 달려온 친구가 김무력의 명령을 전했다.
“장군이 주력을 끌고 전력으로 남하하는 중이네. 남쪽에서 백제 명왕(성왕)이 가야병, 왜병을 연합해 북상중이네. 고리산에 주둔한 태자와 연합하면 더욱 어려워지니 장군의 주력이 태자를 치는 동안, 명왕의 병력을 견제해 시간을 벌어주게.”
“안 그래도 명왕을 막을 준비를 끝내고 명령을 기다렸네.”
부대는 곧장 굴산성을 지나 관산성으로 접근했다. 멀리 어둠 속에 관산성의 그림자가 보이자 도도는 병력을 멈추고 곧 도착할 김무력의 주력을 기다리게 하고 날랜 1백여 명을 뽑아 정찰부대를 편성했다. 그는 친구 지휘관들에게 주둔하며 김무력의 주력과 연락케 하고 어둠을 타고 정찰부대를 데리고 관산성을 지났다. 백제에서 연합군을 몰아 올 명왕의 선발대나 전령이 고리산성의 태자에게 오는 길을 차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명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올라오는 곳과 태자의 주둔지 사이를 잇는 작은 길이 산줄기 사이로 작은 강을 따라 좁다랗게 뻗어 있었다. 강 옆으로 난 가느다란 에움길은 보였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굽어서 보이지 않게 가려진 곳에 도착하자 부하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흩어져 칡넝쿨로 그물을 만들어 깔거나 나무를 베어 길을 막았다. 다른 분대는 낙엽을 긁어와 칡그물을 덮었다.
이튿날, 술시가 되지 않았는데 어둠을 뚫고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그리 많지 않은 숫자였다. 언덕에 숨은 궁수들은 활시위를 칡그물로 조준했다. 이윽고 말을 탄 수십 명의 정찰대가 산길에 나타나 달리다 에움길을 도는 순간 말들이 깎아 세운 장애물에 놀라 멈춰섰다. 화살이 일제히 그곳에 쏟아지고 칡그물이 옥죄이자 날랜 병사 서너 명이 언덕에서 다른 칡그물을 잡고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며 덮어씌웠다. 순식간에 반 이상의 사상자가 생기고 남은 자도 칡넝쿨에 얽혀 옴짝달싹 못 했다. 순식간에 그들의 목젖에 창날이 겨눠졌다.
화톳불로 끌려온 포로 중 흰 수염의 노인은 범접하기 힘든 기세가 엿보였다. 포로들의 태도와 말투가 너무 공손했다. 도도가 나무의자를 내주자 망설이지 않고 앉는 태연자약한 기도가 전장을 누비며 적을 수없이 죽여온 도도로서도 기세에 눌려 칼로 포승을 끊고 물었다.
“명왕이시오?”
포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살려 두면 고민거리가 되니 죽이려고 마음먹은 도도가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비로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
도도는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신라군을 향해 진군한 내용을 상기시켰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를 어기면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
명왕은 차고 있던 칼을 풀어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눈물로 노안을 적셨다.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명왕이 머리를 내밀자 도도는 왕의 칼을 뽑았다. 상현달 차가운 빛이 칼날에서 번쩍였다.
백제의 중흥군주 성왕은 삼년산군 고간 도도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신라군은 전투를 승리하고 김무력은 발판을 세웠다. 진흥왕이 마련한 150여 년의 삼국통일 장기프로젝트의 첫 단추가 무사히 꿰였다. 백제는 다시는 중흥의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못 되어, 통일의 위대한 장정이 삼년산성에서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金庾信)에 의해 개시되고 선산에서 징발된 부대도 첫걸음을 뗐다.
민족통일 전쟁의 출발점이었던 삼년산성은 철옹성답게 149승 1패의 상상하기 힘든 전적을 남겼다. 1패는 신라 후기 헌덕왕 때 산성에 주둔한 반란군 김헌창이 패한 싸움이었는데 내부 분열이 원인으로 짐작된다.
불리할 때는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방파제요, 나아갈 때는 공격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삼년산성은 선산 사람들이 피눈물로 쌓아 올린 기지였다.
(주) 이 지역은 대전과 청주, 영동, 상주로 연결된 요충지인 삼년산성은 충북 보은에 있는 신라시대 당시 축조된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고 소지왕 8년(486)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일선(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삼년산성에 가보면 신라 축성술의 진면목을 알수 있으며, 또한 우리 구미의 선조인 일선군의 장정 3,000명의 피와 땀이 깊게 베인 바람이 되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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